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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주의가 뭐지요?“
“아! 인간이 불행할 때도 모든 것이 최선으로 되어있다고 우기는 일종의 광기라네.” -p. 131.
18세기 프랑스의 천재적인 지성이었던 볼테르의 눈에
시대를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낙천주의는 헛웃음이 나는 유행 같았었나보다.
아마도 모자란 것 없이 태어나 자란 볼테르도 이런저런그런 삶의 굴곡에 좌절했기 때문이겠지.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다 세상은.
군국정치와 개인적인 인정사, 재난에 넌더리를 치며 계몽주의자로 변신했을까.
『캉디드』가 세상을 낙천주의로 아니면 비관주의로 볼 것인가, 라는 질문을 화두로 놓고 있는 작품이라지만
대책없는, 근거없는 낙관주의에 대해 경고했을 뿐 낙천주의를 뿌리부터 배격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긍정적이지 못했다면 사람도 사회도 행복한 엘도라도는 소설 속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우리는 기도를 하지 않아요. 우리는 하느님에게 청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다 주셨으니 말이오.
우리는 끊임없이 감사하고 있을 뿐이오. -p. 121."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스스로 노력해 일구어 나가는 삶.
캉디드는 세계를 떠돌면서 세상을 체험하게 된다.
전쟁, 학살, 강간, 역병, 지진, 무지, 배신, 독단 등의 사건을 겪고,
최선으로 엮여있어 전체적인 선을 이루고 있어야할 세상에 반문하고 절망한다.
이야기는 이성이 결여된 낙천주의, 자가당착에 빠진 지성들의 궤변이 만들어내는
이해불가능한 인과관계에 희생되는 모든 것들.
이라고 두루뭉실하게 압축해서 말할 수 있는데, 관여되는 잣대. 선과 악이 중요하게 탐구되는 주제인 것 같다.
캉디드의 여정은 인간세상을 체험하는 과정으로 선과 악이 늘 교차하고, 선과 악의 근원은 인간의 욕망으로 같았다.
모든 욕망이 충족되고, 해방되는 유일한 최선의 세상은 엘도라도,
현실에선 신화 속에나 등장하는 그 세상만이 완전하고 또 완벽했으니
인간이 뱃속을 채우려는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한 선과 악은 양립할 것이고 편협한 갈등과 이기심도 계속될 것이다
라고 읽혔다.
한편 인간 욕망에 대한 회의적인 정의에도 불구하고,
캉디드의 마지막은 “이제는 우리의 밭을 가꾸어야 합니다.”이다.
인간을 포기했다면 계몽은 있을 수 없다.
볼테르가 가졌던 희망은 이런 것이었을 것 같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절대로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을 가끔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이지요. -p. 180.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자기 생의 소중함.
수없이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그래도 나는 삶에 애착이 있었어.
아마도 이 우스꽝스러운 나약함이 우리들의 가장 불행한 성향 중 하나인 것 같네. -p. 84.
어쩌면 노동하는 삶과 현재적 가치 같은 것.
"추론을 그만두고 일합시다. 일을 하는 것만이 삶을 견딜만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p. 225.
형이상학적이기만한 신에 대한 담론을 비판.
완벽한 행복을 상상 속에서나 찾아헤메는 우매함을 지적.
..등등 다양하게 볼테르의 책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신의 섭리가 아닌 인간 삶에 대한 실제적 철학.
250년이나 지난 지금도 탐구되는 영역의 문제라는 것이
여러가지를 생각하고 돌아보게 만드는 부분이었던 것 같다.
무슨 말이 하고싶어서 자다말고 일어나 횡설수설했는지 잘모르겠다.
내 심정이 그렇게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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